

◆크라톤 왕궁, 족자카르타 특별주지사인 술탄의 거주지
“여기가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술탄이 살고 있는 왕궁입니다. 7명은 아랍계이고 1명은 자바 출신이죠.”
현지 가이드 마데(62)씨가 족자카르타 구 시가지 한 복판에 자리잡은 술탄 왕궁에 다다랐음을 알리면서 주의를 줬다. 이곳에선 큰 소리로 떠들어도 안 되고 모자를 써서도 안된다고 했다.

1756년 건립된 유서깊은 왕궁이다. 흔히 왕궁 하면 높은 건물에 으리으리한 건축물을 상상하기 쉽상인데 크라톤 왕궁은 이외로 수수하다. 건물도 모두 단층이다. 족자카르타에 거대한 불교사원인 보도부드르와 47m 높이의 거대한 힌두사원이 있음에도 정작 한때 이 중부자바를 지배했던 술탄의 왕궁은 소박하기 그지 없다. 하늘을 닿기 위해 높이 쌓아 올려가다 하늘의 노여움으로 무너져내린 바벨밥에서 교훈을 받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왕궁 특유의 웅장함과 위엄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또한 술탄의 의지이자 이슬람 건축의 특성으로 받아들이면 무리가 없겠다 싶다.

왕궁 건물은 자바지역 특유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술탄이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고 연회를 즐기던 회랑만큼은 대리석 바닥과 잘 장식된 검은 기둥이 잘 조화를 이루며 이국적 풍경을 자아낸다.
눈에 띄는 점은 왕궁 건물 입구에 인도네시아 전통 복장을 한 봉사자들의 모습이다. 왕궁을 지키는 시종들로 왕궁 수비대 역할을 한다. 모두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돼 있는데 정년 퇴임한 사람부터 젊은 청년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꺼이 헌신하고 있다. 술탄을 신의 화신으로 여기는 이들은 술탄에게 봉사하는 시간을 가장 영광으로 여긴다고 한다.
모두들 짧은 전통 칼(크리스)을 허리 춤에 차고 왕궁 곳곳에서 대기하는데,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서 자유롭게 왕궁을 지키는 모습이 질서 안에서 자유로운 이슬람 문화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박물관에선 역대 술탄들의 초상화와 함께 왕자 공주들의 다양한 사진을 볼 수 있다. 특히 왕들의 자녀 수가 재미 있게 기록돼 있다. 7대 술탄은 자녀 수가 38명인데 왕과 왕비를 나무의 몸통으로 삼고 자녀들의 이름을 38개 나무 잎에 일일이 새겨놓은 사진이 전시장 벽면에 천연덕스럽게 전시돼 있다. 이슬람 일부다처제의 한 모서리를 직통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술탄은 8대 술탄으로 왕비가 있는데 모두 딸(3명)만 있어 이곳 시민들에겐 술탄의 후계문제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관심사라고 한다.

한편 크라톤 왕궁에는 왕궁 제례행사 사용된 인도네시아 전통악기인 ‘가물란’이 전시돼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마솥 크기의 커다란 징, 놋쇠 요강단지 모양의 구리 악기 등 다양한 징과 건반 타악기를 이용한 합주음악에 사용된다. 인도네시아에선 영혼의 악기로 통하는 힐링 악기다. 다양한 전통 연극 등에 생음악으로 연주된다. 심금을 울리 듯 여리게 소리가 모이다 한번씩 절정으로 치닿는데 맨발로 연주하는 악사들의 얼굴 표정에 경외감이 넘친다.
◆마타람 왕국의 수도였던 솔로시

족자카르타에서 자바섬 중심으로 67km 향하면 고대 도시 솔로가 등장한다. 지도에는 ‘수라카르타’라고 표기돼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솔로(Solo)라고도 부른다. 인도네시아 자와틍아 주의 도시로, 인도네시아 이슬람의 성지다. 면적은 44㎢, 인구는 70만명이다. 시내는 족자카르타보다 휠신 활기차고 특히 음식문화도 잘 발달돼 있다. 1745년 마타람 술탄국이 솔로를 수도로 삼으면서 번영했다.
솔로 왕궁은 크라톤 왕궁의 작은 집 격이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크라톤 왕궁엔 형이, 솔로 왕궁엔 동생이 분가해 왕궁을 차렸다고 한다. 크라톤 왕국이 네덜란드 식민지에 강하게 반대한 데 반해 솔로 왕궁은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후원으로 왕국의 존속을 유지했다고 한다.

왕의 궁전과 왕자 궁전, 그리고 공주 공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관람객들은 왕자의 궁전만 관람이 가능하다. 크라톤 왕궁보다 왕자의 궁이 더 규모가 크고 많은 자료가 있는 게 특징. 크라톤 왕궁과 다른 점은 솔로 왕궁에는 왕족들이 전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기자가 솔로 왕궁에 발을 들여놓은 날은 인도네시아 마지막 일정인 11월 26일. 하루에도 몇 번씩 쏟아지던 비가 뚝 그친 맑은 날이었다. 모처럼 열대지방 특유의 열기를 느껴본다. 팔을 그을리지 않기 위해 바람막이를 걸쳐서인지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힌다. 다른 일행의 얼굴에선 별로 땀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나만 더위를 타는 모양이다.
2박3일 동안 일정을 함께한 인도네시아 관광청 여공무원인 ‘하나’가 왕자 궁의 아름다운 정원 이곳 저곳에서 셀카를 찍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 보인다. 20대 중반인 그녀는 혼혈이다. 아버지가 인도네시아, 어머니가 이집트 출신이다. 그 말을 듣고 그녀의 얼굴은 쳐다보니 흰 얼굴이다. 인도네시아 여성 처럼 가무잡잡하지 않다. 이 또한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는 인도네시아의 장점이다. 숯처럼 검은 피부, 가무잡잡한 피부, 누런 피부, 흰 피부. 이는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인간의 진화의 결과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피부색을 근거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유치한 일일 뿐이다.
한때 왕족들이 거닐며 하루를 보냈을 왕궁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쏘다니다보니 나도 왕자가 되어 이런 삶을 한번 누려보고픈 욕구도 슬며시 든다. 꿈속에서나 가능한 상상이지만 ‘꿈속 같고 동화 같은’ 왕궁을 터벅터벅 걸으니 이만한 더위는 참을만 하다.
한때 솔로 왕궁의 대접견실로 사용되었던 곳은 박물관으로 변해 있었다. 높은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 다양한 왕실 물건들. 왕비와 공주의 손을 빛내주었던 반지서부터 왕족들이 마셨던 화려한 컵들, 식기들, 여기저기서 받은 다양한 값진 선물들. 그중에서도 가장 호기심을 끈 건 인도네시아 전통 칼인 ‘크리스’였다.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이틀째 저녁 족자카르타 시내애서 감상한 인도 대서사시 ‘라마야나’에 등장한 게 저 칼이었다. 남자 주인공 라마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이 참 생긴 게 요상했다. 짧고 날카로운 칼날에 칼 코등이는 한쪽이 타원형으로 길쪽하게 나와 있어 한참동안 눈길이 그쪽으로 갔다. 평소 각국의 칼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탓이다. 라마는 전통 발레의 크라이막스에 이르자 크리스를 뽑아 악당을 찔러대는 동작을 반복적으로 취했다. 크리스 칼은 라마야나를 완성하는 중요한 도구였던 것이다.
그런데 솔로 왕궁 전시관 한쪽에는 수십 종의 크리스가 유리전시장 안에 전시돼 있지 않은가. 사진 촬영 금지를 무시하고 순간적으로 한 컷을 내질렀다. 나중에라도 그 칼을 자세히 음미해 보기 위해서다. 가이드는 크리스 한 자루를 만드는 데 1년이 소요되기도 한다고 들려줬다. 물결 모양의 구불구불한 크리스는 아마도 강도가 높은 사철을 수십번 배접한 듯, 특유의 문양이 보였다.
왕자들이 목욕을 했던 공간도 공개해 놓았고 왕자 공주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찍은 사진들도 복도에 전시돼 있었다. 비밀의 공간에 들어와서야 느낄 수 있는 해방감이 더위를 저만치 멀리 물리친다.
◆왕족의 의상이었던 바틱, 인도네시아 전통 문화의 정수
화려하고 섬세한 문양이 특징은 바틱은 인도네시아 전통 의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틱은 우리 궁중의상처럼 원래 왕족들이 입던 의상으로 발전했다. 왕족들마다 자신들만의 고유 문양으로 신분을 드러내기도 했다. 가장 아름다운 문양은 왕(술탄)의 차지. 일반인들은 왕의 바틱 무늬를 사용할 수 없다.
솔로 왕궁이 있는 솔로시는 그래서 족야카르타, 실본과 함께 인도네시아 3대 바틱 생산지로 유명하다.

사람이 손으로 직접 문양을 넣는 방식(바틱 둘리스), 도구로 찍는 방식(바틱 잡), 공장서 프린트 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제작하는데 전자 게 가장 값이 나간다. 그 중에서도 실크 바틱이 가장 고급이다. 도트,스트라이프, 체크 등 문양도 가지각색이다.

바틱은 남성용은 주로 반팔서부터 긴팔 남방 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여성용은 반발, 나시, 원피스 등 종류가 다양하다. 바틱 옷감도 마치 옛날 중국의 비단 옷감처럼 판매하는데 비싸지 않다. 멋진 문양의 바틱 옷감을 보니 갑자기 이를 사서 창문 커튼으로 사용하고픈 욕구가 일었다.
그만크 바틱 무늬는 화려하고 섬세하다. 중국의 비단, 일본의 기모노 옷감에 견줄 수 있는 멋진 염색 기술이다.

솔로시에 있는 바틱 전문가게에는 2∼3만원짜리 바틱 의상서부터 수십만원 하는 고급 바틱까지 갖추고 있는데, 이곳 가격은 도매가격이나 마찬가지로 저렴하다.
환경오염 문제로 지금은 도시 외곽으로 공장들이 이전했지만 관광객들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몇 개의 바띡 공장이 솔로 시내에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 옷의 메카 남대문시장처럼 솔로시의 바틱 재래시장으로 유명한 곳은 밧사르 클레베르다.
인도네시아(족자카르타·솔로)=글·사진 강민영 선임기자 mykang@sportsworldi.com
<사진설명>
1. 크라톤 왕궁 내 술탄 거주지
2. 크라톤 왕궁 영빈관.
3. 크라톤 왕궁 시종(봉사자).
4. 크라톤 왕궁의 한 시종(봉사자)이 관광객을 호기심에 찬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다. 허리춤엔 전통칼인 크리스가, 한쪽 손에 담배가 쥐어져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5. 크라톤 왕궁 내 박물관.
6. 크라톤 왕궁 7대 술탄 자녀나무.
7. 크라톤 왕궁을 관람하는 인도네시아 학생들.
8. 크라톤왕궁에서 인도네시아 전통 음악인 가물란을 연주하고 있는 모습.
9. 솔로 왕궁 내 왕자의 궁 전경.
10. 솔로 왕궁 내 왕자들의 휴식처.
11. 솔로왕궁 정원에 흠뻑 취한 한 여성 관광객 모습.
12. 솔로시는 3대 바틱 도시 중 하나다.
13. 솔로시내 한 바틱 공장.
14. 솔로시 한 바틱 상점에서 바틱으로 만든 전통모자를 쓰고 포즈를 취한 필자.